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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으로 읽는 세상] 황금닭

러시아 작곡가 림스키코르사코프가 푸슈킨의 서사시를 바탕으로 만든 오페라 ‘황금닭’은 점성술사에 의지해 나라를 다스렸던 무능하고 게으른 왕을 그린 작품이다. 미련하게 살이 찐 도돈 왕은 나라를 통치하는 데에 피로를 느낀다. 그러던 어느 날 한 늙은 점성가가 전쟁을 미리 알려주는 황금닭을 선물한다. 이 황금닭 덕분에 왕은 편하게 나라를 통치한다.   어느 날 황금닭이 적군의 침입을 알리고, 왕자들을 전쟁터로 내보내지만 두 사람 모두 죽고 만다. 아들을 잃고 슬퍼하고 있는데, 절세미인 세마카 여왕이 나타난다. 여왕에게 한눈에 반한 왕은 그녀를 왕비로 삼으려 한다.   “절세의 미인 옆을 느릿느릿 걸어가는 저자는 누구지? 그는 신분상으로는 황제지만 몸과 영혼은 노예라네. 그가 누굴 닮았지? 낙타? 그 이상한 생김새와 행동과 태도는 영락없는 원숭이야.”   하지만 도돈 왕은 자기가 우스꽝스러운 존재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한다. 그러던 어느 날, 점성술사가 다시 나타나 황금닭을 준 대가로 세마카 여왕을 달라고 한다. 왕이 거절하자 갑자기 황금닭이 그를 쪼아 죽인다. 이에 백성들이 노래한다.   “황제는 죽었어. 착한 남자가 죽임을 당했어. 행복한 황제. 태평한 황제. 영원히 잊지 못할 황제. 지배자 중의 지배자. 정말 현명했지. 편안하게 손 하나 까딱 안 하고 백성들을 다스렸어. 화가 났을 때는 무서운 폭풍 같았지. 닥치는 대로 죽여서 모두 두려움에 떨었어. 하지만 구름이 걷히고 무거운 공기가 맑아지면 우리 황제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생생하게 빛나곤 했지.”   손 하나 까딱 안 하고 백성을 다스렸던 황제. 화가 풀리고 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생생하게 빛나던 황제. 백성과 신하들은 무덤덤한 표정으로 죽은 황제에 대해 얘기한다. 모든 것이 꿈인 듯 신비하고 몽롱한 색채를 띤 멜로디로. 진회숙 / 음악평론가음악으로 읽는 세상 황금닭 황금닭 덕분 절세미인 세마카 세마카 여왕

2024-11-18

[음악으로 읽는 세상] 백조의 성

노이슈반슈타인 성을 지은 루트비히 2세는 친구 하나 없이 엄격한 통제 속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고 한다. 고립된 생활을 하던 그에게 유일한 탈출구가 있다면 그것은 벽에 그려져 있는 그림들을 보면서 환상의 나래를 펴는 것이었다. 그 그림 중에 백조의 기사 로엔그린이 있었다. 로엔그린은 백조가 모는 배를 타고 나타나 곤경에 빠진 소녀를 구한 다음 신분을 밝히지 않은 채 홀연히 사라지는 전설 속 인물이다. 바그너가 이 전설을 바탕으로 ‘로엔그린’이라는 오페라를 만들었는데, 루트비히 2세는 15살 때 ‘로엔그린’을 처음 보고 완전히 백조의 기사에 매료되고 말았다. 그리고 속으로 다짐했다. 언젠가는 나의 백조의 성을 지을 것이라고.   루트비히 2세는 19살의 나이로 왕이 되었다. 세상 물정 모르고 환상 속에서 살던 젊은이가 갑자기 실권을 쥐게 되면 무슨 일이 벌어질까? 그 환상을 현실에 구현하기 위해 앞뒤 안 가리고 돌진할 것이다. 루트비히 2세 역시 그랬다. 1869년, 그는 꿈에도 그리던 새로운 백조의 성, 노이슈반슈타인 성을 짓기 시작했다. 말이 백조의 성이지 사실 노이슈반슈타인 성은 ‘바그너 오페라 성’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로엔그린’ ‘탄호이저’ ‘트리스탄과 이졸데’ ‘파르지팔’ ‘뉘른베르크의 마이스터징어’ ‘니벨룽겐의 반지’ 등 바그너 오페라 장면을 담은 그림으로 성 안을 그냥 도배하다시피 했기 때문이다.   루트비히 2세는 성을 짓고 바그너의 오페라를 후원하는 데에 막대한 돈을 썼다. 왕실 재정을 탕진한 것도 모자라 나중에는 빚까지 지게 되었다. 이를 보다 못한 대신들이 그를 왕좌에서 강제로 끌어내렸다. 강제 퇴위를 당한 지 닷새 후인 1886년 6월 13일, 루트비히 2세는 뮌헨 근처의 슈타른베르크 호수에서 의문의 익사체로 발견됐다. 평생 환상 속에 살았던 사람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현실적이고 비극적인 죽음이었다. 진회숙 / 음악평론가음악으로 읽는 세상 백조 바그너 오페라 기사 로엔그린 루트비히 2세

2024-11-11

[음악으로 읽는 세상] 힐데가르트 폰 빙엔

12세기 독일에 힐데가르트 폰 빙엔이라는 수녀가 있었다. 힐데가르트는 최초의 여성 식물학자, 최초의 여류 작가, 최초의 인권주의자, 최초의 여성 작곡가 등 여러 분야에서 ‘최초’를 기록한 위대한 여성으로 꼽힌다. 그녀는 뛰어난 예지력과 지칠줄 모르는 지적 호기심으로 다양한 분야에 뛰어난 업적을 남겼다. 수녀이자 뛰어난 예술가, 작가, 카운셀러, 언어학자, 자연학자, 과학자, 철학자, 의사, 약초학자, 시인, 인권운동가, 예언자, 작곡가였다.   베네딕트회 규율에 따라서 수도사들은 하루 여덟 번의 성무일도(聖務日禱)를 드렸다. 성무일도란 교회에서 정해진 시간에 하느님을 찬미하는 기도를 말한다. 힐데가르트가 수도원에서 수녀 수업을 받고 있을 당시, 여자 수도원에는 두 개의 창문이 있었다. 하나는 밖을 향해 나 있었고, 다른 하나는 교회의 작은 성가대석을 향해 있었는데, 수녀들은 바로 이 창문 앞에 앉아 전례에 참석했다. 힐데가르트 역시 이 창문을 통해 말과 음악이 교차하는 성무일도를 들었다.   이런 경험을 통해 힐데가르트는 음악성을 키웠다. 총명했던 그녀는 전문적인 음악 교육을 받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악보를 읽고 쓸 줄 알았다. 힐데가르트가 전례시와 음악을 쓰기 시작한 것은 그녀의 나이 42살 때부터였다. 성무일도를 위해 작곡한 그녀의 음악은 주로 성자들의 일생을 그린 것이었는데, 나중에 이것을 모아 ‘하늘의 계시에 의한 교향곡’이라는 제목으로 발표하기도 했다.   그녀의 작품 중에 ‘성덕의 열’이라는 것이 있다. 등장인물들이 역할을 나누어 부르는 음악극인데, 가사와 곡이 모두 남아 있는 유일한 중세 음악으로 꼽힌다. 중세에도 물론 다양한 음악들이 있었다. 하지만 이들은 모두 중세라는 시대와 함께 사라지고 말았다. 그런 의미에서 기록이 남아있는 힐데가르트 폰 빙엔의 ‘성덕의 열’은 중세라는 암흑시대를 비추는 한 줄기 찬란한 빛이라고 할 수 있다. 진회숙 / 음악평론가음악으로 읽는 세상 여성 작곡가 중세 음악 여성 식물학자

2024-11-04

[음악으로 읽는 세상] 라흐마니노프 변주곡

라흐마니노프의 대표작 ‘파가니니 주제에 의한 랩소디’는 랩소디라는 말이 들어가 있지만 사실은 변주곡 형식으로 작곡된 곡이다. 변주곡은 하나의 주제를 멜로디, 화음, 박자, 리듬, 조성 등 여러 가지 측면에서 다양하게 변형해나가는 음악을 말한다. 주제선율은 파가니니의 ‘카프리스’ 제24번에서 가져 왔다.   변주의 본질은 ‘변화’이다. 하지만 변주곡에서의 변화는 ‘한정된 틀 안에서의 변화’를 의미한다. 변주곡의 각 변주들은 어떤 형태로 변형되든 주제를 그 안에 품고 있다. 아무리 자유분방하게 변형된 경우라도 주제와의 연관성은 늘 음악 속에 잠복해 있다. 주제의 뼈대는 유지한 채 끊임없이 새로운 상상력을 펼쳐나가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변주곡은 통일성 속에 다양성을 구현해내는 가장 이상적인 음악이라 할 수 있다.   ‘파가니니 주제에 의한 랩소디’에 나오는 다양한 변주들에서도 역시 원곡인 ‘카프리스’ 24번과의 연관성을 찾을 수 있다. 그런데 그중에서 아무리 들어도 원곡과의 연관성을 찾을 수 없는 것이 있다. 바로 제18변주이다. 제18변주는 서정적이고 로맨틱한 멜로디 때문에 영화와 CF의 배경음악으로 자주 등장하는데, 원곡인 파가니니의 ‘카프리스’ 24번과는 정서부터 다르다. 카프리스는 빠르고 경쾌한 반면, 제18변주는 느리고 로맨틱하다.   이처럼 변주곡 중에는 그냥 들어서는 전혀 주제와의 연관성을 알 수 없는 것이 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서 이런 선율이 나왔을까? 라흐마니노프는 파가니니의 주제 선율을 여러 차례 변형했다. 먼저 단조에서 장조로 옮기고, 다른 조를 바꾼 다음, 그렇게 바뀐 멜로디의 첫 소절의 음들을 거꾸로 배열하고, 템포를 느리게 설정했다. 이렇게 변신에 변신을 거듭한 끝에 나온 것이 제18변주다. 경쾌하고 발랄한 파가니니의 주제선율이 달콤하고 낭만적인 선율로 바뀌게 된 과정에는 바로 이런 비밀이 숨어 있었던 것이다. 진회숙 / 음악평론가음악으로 읽는 세상 라흐마니노프 변주곡 라흐마니노프 변주곡 변주곡 형식 파가니니 주제

2024-10-28

[음악으로 읽는 세상] 우주는 거대한 현악기

고대 그리스의 수학자이자 철학자인 피타고라스는 만물의 원리를 수(數)에서 찾은 학자였다. 그는 ‘신성한 연주’의 헌사에서 음악의 신 오르페우스의 입을 빌려 이렇게 말했다.   “웅변과 서사시의 여신이며 아홉 뮤즈의 여신 중의 하나인 칼리오페의 아들인 오르페우스는 그의 어머니로부터 판가이우스 산에서 지혜를 배웠다. 그리하여 오르페우스는 수(數)의 영원한 본질은 천상과 지구, 그리고 그 사이에 있는 모든 자연에 관한 최고신의 섭리라고 말했다.”   피타고라스는 음악에 내재된 수의 법칙을 우주에도 적용했다. 그는 현악기에 나타나는 줄 길이의 비가 태양계를 구성하는 별들 사이 거리의 비와 비슷하다는 것을 발견했다. 그래서 음악의 비례 법칙을 조화의 근본 원리로 우주에 적용한 ‘천구의 음악’ 이론을 발표했다.   피타고라스에게 있어서 우주는 여러 개의 줄을 가진 거대한 현악기였다. 별들이 공전할 때 이 거대한 우주의 악기는 별들이 위치한 거리의 비율에 따라 각기 다른 소리를 낸다. 이것이 바로 ‘천구의 음악’이다. 별들이 움직이는 속도는 중심으로부터의 거리에 따라 달라진다. 중심에서 가까운 별은 느리게 움직이기 때문에 낮은 소리를 내고, 중심에서 먼 별은 빠르게 움직이기 때문에 높은 소리를 낸다. 중심에서 화성과 지구의 거리 비례는 약 2 대 3이 되는데, 따라서 두 별은 서로 5도 관계에 있는 음을 연주한다. 한편 그 자체가 완전한 조화를 이루고 있는 우주 전체에서는 옥타브 소리가 난다고 믿었다.   피타고라스는 밤하늘을 바라보면서 정말 우주의 하모니를 들었을까? 물론 아닐 것이다. 별들이 자기 소리를 낸다는 것은 어디까지나 ‘믿음’의 영역에 불과하니까. 그런데도 그가 이렇게 믿은 것은 음악 말고는 이 완벽한 조화를 설명할 길이 없어서 아닐까? 진회숙 / 음악평론가음악으로 읽는 세상 현악기 우주 우주 전체 옥타브 소리 거리 비례

2024-10-21

[음악으로 읽는 세상] ‘죽음과 소녀’

슈베르트의 현악4중주 14번에는 ‘죽음과 소녀’라는 제목이 붙어 있다. 이런 제목이 붙은 이유는 이 곡의 2악장이 슈베르트의 가곡 ‘죽음과 소녀’의 선율을 주제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마티아스 클라우디우스의 시에 곡을 붙인 가곡 ‘죽음과 소녀’는 소녀를 데려가려는 죽음과 이를 거부하는 소녀와의 대화로 이루어져 있다. “저리 가요. 저리 가라구요. 나는 아직 젊어요. 그러니 이대로 내버려 두세요.” “아름답고 상냥한 아가씨, 나는 너의 친구야. 두려워 말고 내 품에서 편히 잠들려무나.”   현악4중주는 이런 가곡의 선율을 주제로 다양한 변주가 펼쳐진다. 처음에 주제를 제시하는 부분은 ‘죽음’이 친절한 친구로 가장하고 소녀에게 접근하듯 그렇게 아름답고 우아할 수가 없다. 주제가 끝나고 나오는 첫 번째 변주 역시 그렇다. 여기서 제1바이올린은 고음역 특유의 화려한 음색으로 주제선율을 아름답게 장식한다. 특히 프레이즈의 끝자락을 사라지듯 장식하는 아련하고 처연한 멜로디가 일품이다.   두 번째 변주에서는 첼로가 중후하고 편안한 목소리로 듣는 이의 마음을 위로해 준다. 하지만 그다음 변주부터 현악기들이 절규하기 시작한다. 절규라고 해야 할까, 아니면 비명이라고 해야 할까. 격렬하게 현을 긁어대기 시작한다. 그랬다가 언제 그랬냐는 듯 처음의 평화로 돌아온다. 하지만 곧 다시 시작되는 절규와 비명. 이런 처절한 몸부림이 모두 지나고 나면 현악기들이 조용히 ‘죽음과 소녀’의 멜로디를 연주하며 끝을 맺는다.   말년에 슈베르트는 병마에 시달렸다. 심한 두통과 고열, 구토로 괴로워하는 와중에 그는 “묻히는 건 싫어. 혼자 있는 건 싫어”라고 중얼거렸다고 한다. 음악 속의 소녀처럼 그 역시 죽음에 저항했던 것이다. 하지만 슈베르트는 죽음과의 싸움에서 패배했다. ‘죽음과 소녀’를 작곡한 지 2년이 지난 1828년, 31살이라는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진회숙 / 음악평론가음악으로 읽는 세상 죽음 소녀 현악4중주 14번 마티아스 클라우디우스 고열 구토로

2024-10-07

[음악으로 읽는 세상] 서푼짜리 오페라

1782년 영국에서 초연된 존 게이 극본, 페푸쉬 음악의 ‘거지 오페라’는 당시 런던 오페라 무대를 휩쓸던 이탈리아 오페라에 대한 반감에서 나온 것이다. 당시 이탈리아 오페라의 주된 소재는 그리스 로마 신화나 왕·영웅·귀족들의 일대기였는데, 이 작품은 당대를 살아가는 밑바닥 사람들의 이야기를 그렸다.   ‘거지 오페라’가 나온 지 150년이 지난 1928년, 독일의 극작가 브레히트는 작곡가 쿠르트 바일과 손잡고 이 작품을 번안한 ‘서푼짜리 오페라’를 만들었다. ‘거지 오페라’와 마찬가지로 ‘서푼짜리 오페라’의 등장인물은 도둑질이나 사기, 매춘, 폭력, 부정을 일삼으며 살아가는 밑바닥 인간들이다. 왕이나 귀족, 그리스 로마의 신들이 줄줄이 나오는 이탈리아 오페라에 비해 등장인물들의 신분이 엄청나게 낮아졌다.   신분이 달라졌으니 음악도 달라질 수밖에 없다. 밑바닥 인생들의 노래가 왕후장상의 노래와 같을 수는 없으니까. 이 오페라에 나오는 노래들은 일단 부르기가 쉽다. 전문적인 성악훈련을 받아야 부를 수 있는 오페라 아리아와 사뭇 다르다. 멜로디도 그냥 평이하다. 그렇게 평이한 노래를 ‘잰 체하지 않고’ 부른다. 잘 부르려는 어떤 노력도 없이, 혼신의 힘을 절대로 기울이지 않고, 전혀 심각하지 않게, 통곡하거나 격렬하게 분노하지도 않고 남의 얘기하듯 부른다.   ‘서푼짜리 오페라’는 탐욕과 위선으로 가득 찬 당대 사회를 냉소적으로 풍자한 작품이다. 마지막에 칼잡이 매키스가 교수형에 처해지기 직전 왕의 사신이 나타나 그가 사면됐음을 알리는 장면이 나온다. 관객들은 극이 해피엔딩으로 끝났다고 기뻐한다. 하지만 여기서 브레히트는 매키스의 입을 통해 관객들에게 냉철한 메시지를 던진다. 방금 보았던 해피엔딩은 실제가 아닌 환상이라고. 당신들의 삶에 ‘왕이 보낸 사신’은 오지 않는다고. 진회숙 / 음악평론가음악으로 읽는 세상 오페라 이탈리아 오페라 오페라 아리아 그리스 로마

2024-09-30

[음악으로 읽는 세상] 베토벤의 마지막 4중주

1824년, ‘합창교향곡’을 발표한 후 베토벤은 더 이상 교향곡과 같은 대편성의 곡을 쓰지 않았다. 대신 보다 내밀하고 개인적인 양식인 현악 4중주에 귀의했다. 건강이 극도로 악화해 자주 병마에 시달리면서도 베토벤은 꺼져가는 생명을 부여잡고 마지막까지 현악 4중주에 매달렸다. 만약 베토벤이 오래 살았다면 이후의 작품은 모두 현악 4중주였을 지도 모른다.   베토벤은 모두 16곡의 현악 4중주를 썼는데, 베토벤이 말년에 작곡한 6곡의 현악 4중주를 ‘후기 현악 4중주’라고 부른다. 베토벤의 ‘후기 현악 4중주’는 선배 작곡가인 하이든이나 모차르트의 현악 4중주와 다르다. 하이든과 모차르트의 현악 4중주에서는 네 개의 악기가 균형과 조화를 이루지만 베토벤의 후기 현악 4중주는 그렇지 않다. 때로는 조화를 이루기도 하지만, 때로는 서로 갈등하고 반목하기도 한다.   베토벤의 후기 현악 4중주 중 14번은 특이하게 7악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전 악장을 쉬지 않고 연주하는데, 각 성부가 화기애애하게 이야기를 나누다가 갑자기 서로 다투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마지막 악장에 이르면 전반부의 느슨한 평화가 깨진다. 중간중간 네 악기가 한목소리를 내는 유니슨이 나오지만, 곧 언제 그랬냐는 듯 투쟁 모드로 들어가곤 한다. 유니슨조차 지극히 전투적이다. 그렇게 심오한 성찰에서 느슨한 평화를 거쳐 격렬한 투쟁으로 끝난다.   예술가의 말년의 작품은 내밀한 자기 고백인 경우가 많다. 베토벤의 후기 현악 4중주도 그렇다. 여기에는 베토벤 자신의 성찰은 물론 세상을 향한 격렬한 분노, 인간적인 흐느낌, 신성에 대한 갈망, 초월적인 체념, 억눌린 욕망의 분출, 자유분방한 인습 파괴의 욕구 같은 것들이 총망라되어 있다. 그렇게 베토벤은 후기 현악 4중주를 통해 자기 자신의 삶을 정리하고, 음악을 인간의 삶과 무관한 것으로 취급했던 고전주의 시대와도 결별을 고했다. 진회숙 / 음악평론가음악으로 읽는 세상 베토벤 중주 현악 4중주 베토벤 자신 마지막 4중주

2024-09-23

[음악으로 읽는 세상] 우연이 만들어낸 신화

알레그리의 ‘미제레레 메이’는 로마 시스티나 예배당에서 치르는 고난 주간 의식을 위해 작곡한 것이다. 다윗의 참회시를 바탕으로 만든 이 곡은 시스티나 예배당 밖에서는 들을 수 없었다. 교황이 악보의 반출을 금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이 곡을 듣기 위해 로마를 찾았다.   멘델스존도 그중 한 사람이었다. 1831년, 그는 시스티나 예배당을 찾아 ‘미제레레 메이’를 들었다. 하지만 당시 그가 들은 것은 알레그리의 원곡을 4도 높여 부르는 것이었다. 이 곡에서 가장 아름다운 부분은 보이 소프라노가 청아한 목소리로 하늘 높이 ‘하이 C’를 부르는 대목이다. 마치 하늘에서 천사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듯한 이 효과 역시 원곡을 4도 높였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누군가가 노래의 화려함을 더하기 위해 4도 높게 연주했는데, ‘우연히’ 멘델스존이 그것을 들은 것이다. 멘델스존은 자기가 들은 것을 그대로 악보에 옮겨 적었다.   그로부터 50년이 지난 1880년, 글로브 음악사전이 발간되었다. 이 사전의 ‘미제레레 메이’를 소개하는 항목에 곡 설명과 함께 악보가 실렸는데, 중간에 어떤 실수가 있었는지 모르지만 여하튼 멘델스존의 악보, 즉 원곡보다 4도 높은 악보가 들어가게 되었다. 그 후 이 악보는 알레그리의 ‘미제레레 메이’라는 이름으로 수없이 재생산되었다.   누군가 ‘우연히’ 4도 높여 노래했고, 그걸 ‘우연히’ 멘델스존이 들었으며, 음악사전의 편집자가 ‘우연히’ 이것을 오리지널 악보에 집어넣는 실수를 저질렀다. 이런 몇 개의 ‘우연’이 모여 오늘날의 ‘미제레레 메이’가 되었다. 오리지널 악보가 어떤 것이었든, 우리는 멘델스존의 ‘하이 C’를 들으며 영혼에 충만한 희열을 느낀다. 그리하여 알레그리의 ‘미제레레 메이’는 불후의 명곡이 되었다. 우연이 또 다른 신화를 만들어낸 것이다. 진회숙 / 음악평론가음악으로 읽는 세상 우연 신화 미제레레 메이 오리지널 악보 시스티나 예배당

2024-09-16

[음악으로 읽는 세상] 슈베르트

슈베르트는 평생 600여 곡의 예술가곡을 작곡한 ‘가곡의 왕’이다. 물론 그가 가곡만 작곡한 것은 아니다. 교향곡, 실내악, 피아노 독주곡 등 악기를 위한 곡도 많이 작곡했다. 하지만 그의 작품 전체를 관통하는 하나의 이상(理想)은 ‘노래’이다. 슈베르트는 악기를 가지고도 노래를 부른다. 세상의 모든 음악이 본질적으로 노래일진대 슈베르트는 그중에서도 가장 노래를 잘 부르는 작곡가라고 할 수 있다.   악기의 특성에 따라 노래가 잘 되는 악기가 있고, 그렇지 못한 악기가 있다. 인간의 목소리는 호흡이 허락하는 한 얼마든지 레가토(부드럽게 이어서 연주하는 것)가 가능한 악기이다. 이 점은 관악기도 마찬가지이다. 한편 바이올린과 같은 현악기는 호흡의 제약도 받지 않는 완전히 자유로운 레가토 악기이다. 얼마든지 길게 레가토를 할 수 있다.   하지만 피아노는 그렇지 못하다. 피아노는 해머로 줄을 때려서 소리를 내는 일종의 타악기이다. 레가토가 원천적으로 불가능한 악기라는 말이다. 이런 단점을 보완하기 위해 소리를 지속시켜주는 페달이 발명되었지만, 그 지속력이 인간의 목소리나 관악기, 현악기에 비할 바가 못 된다. 그런데 슈베르트는 피아노 속에서 최대한으로 레가토를 끌어낸다. 멜로디 라인을 유연하게, 프레이즈의 마지막 음까지 음과 음 사이를 부드럽게 이어가며 노래 부르도록 한다.   슈베르트의 ‘즉흥곡’ 작품 90의 제3번이 특히 그런 곡이다. 슈베르트는 여러 곡의 즉흥곡을 썼는데, 그중에서 특히 제3번은 듣는 이에게 피아노로 노래를 부른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알게 해 준다. 여기서 피아노는 처음부터 끝까지 낮은 목소리로 부드럽게 노래한다. 피아노곡이지만 멜로디를 인간의 목소리로 불러도 전혀 손색이 없다. 오른손은 멜로디를, 왼손은 반주를 연주하는데, 그 아름답고 명상적인 멜로디를 듣고 있으면 마음속 상처가 치유되는 듯한 느낌이 든다. 진회숙 / 음악평론가음악으로 읽는 세상 슈베르트 노래일진대 슈베르트 관악기 현악기 멜로디 라인

2024-09-09

[음악으로 읽는 세상] 파에톤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파에톤은 태양신 헬리오스의 혼외(婚外) 자식이다. 아버지 없이 어머니 손에서 자란 그는 어느 날 헬리오스를 찾아가 그가 모는 태양마차를 몰게 해달라고 조른다. 헬리오스는 마지못해 그의 부탁을 들어준다. 하지만 파에톤이 끌던 말들이 통제 불능 상태에 빠지는 바람에 온 세상이 불바다가 되고 만다. 보다 못한 제우스가 벼락을 내리치고, 파에톤은 바닥에 떨어져 그 자리에서 절명하고 만다.   생상스의 교향시 ‘파에톤’은 파에톤이 태양마차를 타고 으스대다가  바닥으로 추락해 죽음에 이르는 과정을 그린 것이다. 음악은 짧지만 강렬한 서주로 시작한다. 그런 다음 마차가 달린다. 말들이 질주하듯 음악도 일정한 템포로 위로 올라갔다가 아래로 내려온다. 이때까지만 해도 파에톤의 태양마차는 리드미컬하게 제 궤도를 달리고 있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말들이 요동치기 시작한다. 말들이 난무하듯이 음악도 난무한다. 통제 불능에 빠진 말들이 연출하는 우주의 난장판 쇼가 펼쳐진다. 한바탕 쇼가 펼쳐진 후 음악이 잠시 소강상태에 접어든다. 이 느리고 조용한 분위기는 잠시 뒤에 일어날 파에톤의 재앙에 대한 불안감을 표현한 것일까. 아니면 파에톤의 추락을 더욱 드라마틱하게 보이도록 하기 위한 예비 음모일까. 곧이어 말들이 다시 난동을 부리기 시작하고 결국 파에톤은 추락하고 만다.   비록 죽음으로 끝날지언정 생상스의 음악 속 파에톤은 의기양양하고 역동적이고, 한편으로는 귀엽기까지 하다. 이 곡을 통해 생상스가 표현하고자 했던 파에톤은 결국 추락하고 마는 파에톤이 아니라 자신을 괴롭혀 오던 서자 콤플렉스를 마침내 극복하고 보란 듯이 아버지의 마차를 타고 의기양양 우주 공간을 질주하는 파에톤이 아니었을까. 속도감 있는 생상스의 음악은 파에톤이 펼치는 우주의 드라마를 경쾌한 기분으로 감상하도록 만든다. 진회숙 / 음악평론가음악으로 읽는 세상 파에톤 태양신 헬리오스 의기양양 우주 통제 불능

2024-08-26

[음악으로 읽는 세상] 마법사의 제자

프랑스 작곡가 폴 뒤카의 ‘마법사의 제자’는 독일 작가 괴테의 이야기 시를 음악으로 옮겨놓은 것이다. 옛날에 늙은 마법사에게 어린 제자가 있었다. 어느 날, 스승이 외출하자 제자는 빗자루에게 마법을 걸어 물을 길어오게 한다. 그리고 흐뭇한 표정으로 그 광경을 바라본다. 여기서 빗자루가 물 긷는 모습은 파곳이 경쾌하게 묘사한다. 파곳에 이어 네 개의 혼(horn)과 바이올린이 물 긷는 주제를 이어받는 동안 물은 계속 불어난다. 어느덧 온 집안이 물바다가 되고 만다.   사태가 심각해지자 제자가 빗자루에 말한다. “멈추어라. 너의 재능을 다 보았느니라.” 그런데 이를 어쩌나. 마법을 푸는 주문을 잊어버린 것이다. 제자는 빗자루가 계속해서 물을 길어오는 것을 속수무책으로 바라보고 있다. 빗자루 역할을 맡은 목관악기와 금관악기들은 힘차게 행진을 계속하고, 제자 역할을 맡은 현악기들은 위아래로 불안하게 오르내리며 비명을 지른다. 당황한 제자는 도끼로 빗자루를 내려친다. 그 결과 빗자루가 쪼개진다. 하지만 상황은 더 악화된다. 빗자루가 두 개가 되었기 때문이다. 동지가 생긴 빗자루들은 더욱 의기양양하게 물을 퍼 나른다. 양동이의 물을 부을 때마다 심벌즈가 ‘짠’하고 화려한 소리를 낸다.   이 상황을 자기 힘으로 수습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은 제자는 스승을 부른다. 제자가 벌여놓은 일을 수습하기 위해 마법사가 주문을 왼다. 여기서 마법사 역할은 금관악기가 맡는다. “빗자루야,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가라.” 그러자 모든 것이 예전으로 돌아간다. 상황이 정리된 후, 제자는 두려운 눈빛으로 마법사를 바라본다. 하지만 그는 제자를 노려보며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잠시 어색한 침묵이 흐른다. 그러다가 갑자기 모든 악기들이 상승하는 네 개의 음을 짧고 힘차게 연주한다. 마법사가 제자를 꾸짖는 일성(一聲)이다. 진회숙 / 음악평론가음악으로 읽는 세상 마법사 제자 마법사 역할 제자 역할 빗자루 역할

2024-08-19

[음악으로 읽는 세상] 행운이 이어지기를

1993년에 개봉된 영화 ‘미세스 다웃파이어’는 주인공 다니엘이 애니메이션을 더빙하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이때 다니엘이 더빙하면서 부르는 노래는 로시니의 오페라 ‘세빌리아의 이발사’에 나오는 피가로의 아리아 ‘나는 이 거리의 해결사’이다. 만능 해결사로 통하는 피가로가 자신의 능력을 과시하면서 부르는 것이다. 마을 사람들이 앞 다투어 피가로를 부르는 광경을 빠른 템포의 패시지에 실어 무한 반복한다.   멜로디는 다르지만 이런 기법은 로시니의 희극 오페라 어디에서나 발견되는 관용적인 어법이다. 이것은 관성의 법칙에 의해 돌아가는 바퀴처럼 음악에 일정한 속도감을 부여한다. 한번 속도가 붙으면 절대 멈출 수 없다. 감정이 최고조에 달할 때까지 무한질주를 계속한다.   피가로의 노래도 그렇다. 처음에 호방하게 시작한 피가로의 자화자찬은 템포에 가속이 붙으며 점차 절정으로 치닫는다. 여기저기서 피가로를 불러대는 마을 사람들. 그는 제발 천천히 한 사람씩 얘기하라고 즐거운 비명을 지른다. 여기서도 피가로, 저기서도 피가로. 빠른 템포의 패시지로 무한 반복된다. 그러다가 마지막 대목에 이르면 템포가 인간의 혀가 허용하는 극한의 경지까지 치닫는다.   피가로가 자랑한 것처럼 그는 정말로 많은 재주를 가진 재간꾼이다. 이 점은 ‘미세스 다웃파이어’의 다니엘과 비슷하다. 다른 점이 있다면 피가로는 세속적인 계산에 밝은 반면, 다니엘은 그렇지 못하다는 데 있다. 하지만 다니엘이 무능한 것은 아니다. 현실적이지 못한 처세 때문에 늘 손해를 본 것이다. 그렇다고 그 재주가 어디로 가나. 결국 그는 자신의 재주로 성공한다. 그 모습에 축복을 보내고 싶다. 피가로의 노래를 빌어서.   “아! 훌륭해. 아주 훌륭해. 랄라라라라라…. 행복한 인생이야. 앞으로 행운이 계속 이어지기를” 진회숙 / 음악평론가음악으로 읽는 세상 행운 피가로 저기 주인공 다니엘 이때 다니엘

2024-08-12

[음악으로 읽는 세상] 바다 교향곡

‘바다 교향곡’은 영국 작곡가 랠프 본윌리엄스가 미국 시인 휘트먼의 시에 영감을 받아 작곡한 곡이다. 휘트먼은 민주주의의 시인, 자유와 평등의 시인, 인도주의의 시인으로 통한다. 그는 자유와 평등에 바탕을 둔 개인주의의 찬미자이며, 복종을 혐오하고 저항의 복음을 소리 높이 외친 시인이었다.   랠프 본윌리엄스는 복종과 귀환, 안정을 거부하는 그의 시 정신에 깊이 매료되었고, 자신도 자유와 방황, 탐험을 지향했다. 특히 인간의 삶과 영혼, 자유와 평등, 개척 정신을 바다와 항해, 배에 비유한 시에 깊은 인상을 받았으며, 이에 영감을 받아 합창과 오케스트라가 함께 하는 ‘바다 교향곡’이라는 바다 찬가를 작곡했다. 금관악기의 팡파르로 시작해 곧바로 합창으로 이어지는 이 교향곡의 도입부는 강렬한 인상을 준다.   “보라. 바다를! 끊임없이 요동치는 가슴, 그 위에 떠 있는 배들을! 보라! 바람 속에 부풀어지며, 초록빛과 푸른빛으로 점점이 부서지는 그 하얀 항해를! 오늘 바다를 항해하는 배의 거친, 짧은 레치타티보. 사납게 흩어지는 물살과 포효하는 소리로 불어 제치는 바람. 모든 나라의 뱃사람의 노래. 펄펄 날려라! 오! 바다여. 너희 나라의 국기를! 펄펄 날려라! 모든 용감한 선장들! 슬퍼하라! 그들의 의무를 다한 배와 더불어 침몰한 모든 뱃사람들!”   단조로 시작한 금관악기의 팡파르가 바로 “보라. 바다를”이라는 합창으로 이어지는데, ‘바다’라는 단어에서 화음이 장조로 바뀌는 것이 인상적이다. 단조로 에너지를 응축해서 장조에서 거대하게 분출하는 것이다. 바다가 연출하는 강렬한 에너지를 이처럼 도발적으로 묘사한 음악이 또 있을까. 휘트먼과 랠프 본윌리엄스는 낭만주의자이자 탐험가, 개척자였다. 그들의 배는 거친 파도와 싸우며 늘 바다 위에 떠 있었다. 그리고 영원히 항구로 돌아오는 것을 거부했다. 진회숙 / 음악평론가음악으로 읽는 세상 교향곡 바다 교향곡 오늘 바다 작곡가 랠프

2024-08-05

[음악으로 읽는 세상] 백조 구이의 노래

카를 오르프의 칸타타 ‘카르미나 부라나’는 중세 음유시인들의 시에 곡을 붙인 것이다. 이 작품은 모두 24곡의 노래로 구성돼 있는데, 이 중에서 ‘왕년에 엄청 잘나갔던’ 인간을 백조에게 빗댄 노래가 있다. 노래는 백조가 우아하고 아름다웠던 자신의 ‘리즈 시절’을 회상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난 옛날에 호수에서 살았어. 그때 정말 아름다웠지. 내가 백조였거든.” 테너가 소리 높여 노래하고 나면 남성 합창이 후렴을 받는다. “불쌍하구나. 불쌍해. 지금은 불에 까맣게 구워지고 있구나.”   아니. 이게 무슨 소리지? 백조가 까맣게 불에 구워지고 있다고? 그렇다. 지금 백조는 호수에서 잡혀 와 바비큐가 되는 중이다. 왕년에 잘나갔으면 뭐하나. 지금은 장작불에서 통으로 구워지고 있는 것을. 그런 백조를 지켜보는 사람들이 측은지심을 느낀다. 그래서 이구동성으로 “불쌍하구나. 불쌍해!”를 외친다.   백조는 불 위에서 서서히 죽어 간다. 한 절이 끝날 때마다 나오는 간주가 날개를 푸드덕거리며 죽어 가는 새의 모습을 생생하게 묘사한다.   “시종이 나를 꼬챙이에 꿰서 돌리고 있네. 장작 위에서 까맣게 구워졌어. 이제 웨이터가 나를 내갈 준비를 하는구나.”   3절에서 백조는 이렇게 노래한다. “나는 이제 접시 위에 누워 있다. 더 이상 날지도 못하고, 나를 먹어치울 이빨들만 바라보고 있구나.”   클래식 음악에는 백조를 묘사한 것들이 꽤 많다. 그리고 그 음악들은 모두 하나같이 아름답고 우아한 선율을 자랑한다. 하지만 중세 음유시인이 그린 선술집의 백조는 이와는 사뭇 다르다. 까맣게 타서 바비큐가 된 백조다. 카를 오르프는 이렇게 통구이가 된 백조를 코믹한 음악으로 묘사했다. 호수를 유유히 헤엄치고 있을 때 누가 이런 최후를 상상했으랴. 우리의 젊음도, 우리의 화려한 시간도 눈 깜빡할 사이에 지나간다. 그러니 우리 세월 앞에 겸손해지자. 진회숙 / 음악평론가음악으로 읽는 세상 백조 구이 백조 구이 중세 음유시인들 클래식 음악

2024-07-29

[음악으로 읽는 세상] 솔베이그의 사랑

사랑에는 여러 종류가 있다. ‘기브 앤 테이크’의 계산적인 사랑이 있는가 하면 상대에게 무조건 주기만 하는 조건 없는 사랑도 있다. 예술 작품에서 순애보는 아름다운 사랑으로 포장되곤 한다. 이런 경우 성 역할은 정해져 있는데, 대개 주는 쪽은 여자고, 받는 쪽은 남자다.   입센의 희곡 ‘페르 귄트’에 나오는 솔베이그의 사랑이 바로 그런 사랑이다. 솔베이그는 순애보적인 사랑의 표상과 같은 여인이다. 언제 돌아올지 모르는 페르 귄트를 하염없이 기다리고 또 기다린다. 그리그가 연극 ‘페르 귄트’의 공연을 위해 작곡한 ‘솔베이그의 노래’를 들어보면 그녀가 얼마나 지고지순한 사랑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있다. 여기서 솔베이그는 겨울이 지나 봄이 오고, 또 여름이 와도 언제까지나 당신을 기다릴 것이라고 노래한다.   페르 귄트는 고향에서 자기를 기다리고 있는 솔베이그는 까맣게 잊고 온갖 허황된 꿈을 찾아 이리 저리 돌아다닌다. 그러는 사이에 어느 덧 노인이 된다. 늙은 페르 귄트는 그 동안에 번 재물을 배에 하나 가득 싣고 귀국길에 오른다. 하지만 도중에 폭풍을 만나 재물을 가득 실은 배가 침몰하고 만다. 다시 무일푼이 된 페르 귄트는 거지나 다름없는 꼴로 산중 오두막을 찾는다. 그곳에는 이미 백발이 된 솔베이그가 여전히 그를 기다리고 있다. 솔베이그를 만난 페르 귄트가 묻는다.   “우리가 마지막으로 만난 후, 페르 귄트는 어디에 있었지? 온전하고 진실한 페르 귄트는 어디에 있었던 거지?” 그러자 솔베이그가 대답한다. “내 믿음, 내 소망, 내 사랑 안에 있었어요.”   페르 귄트는 솔베이그의 무릎을 베고, 그녀가 노래하는 자장가를 듣는다. 여기서 자장가를 부르는 솔베이그는 자신을 어머니, 페르 귄트를 아기라고 부른다. 그렇게 늙고 병든 페르 귄트를 어머니처럼 품어준 것이다. 그 편안한 품 안에서 페르 귄트는 조용히 숨을 거둔다. 진회숙 / 음악평론가음악으로 읽는 세상 솔베이 사랑 순애보적인 사랑 산중 오두막 예술 작품

2024-07-22

[음악으로 읽는 세상] 돈 지오반니

모차르트의 오페라 ‘돈 지오반니’는 희대의 바람둥이 돈 지오반니의 일대기를 그린 작품이다. 돈 지오반니는 유혹의 고수였다. 사실 여자를 유혹할 때, 못생긴 여자에게 예쁘다고 하는 건 하수들이나 하는 짓이다. 진짜 기술자는 그렇게 안 한다. 성격이 좋다거나 피부가 곱다거나 뭐 이런 식으로 칭찬을 한다.   이렇게 뛰어난 언변을 무기로 돈 지오반니는 이탈리아에서 640명, 독일에서 231명, 프랑스에서 100명, 터키에서 91명 그리고 스페인에선 고향이라서 그런지 무려 1003명이나 되는 여자들을 유혹하는 데에 성공했다. 이렇게 많은 여자를 유혹하면서도 돈 지오반니는 그의 사랑이 진심이라고 믿게 만들었다. 그래서 그런지 끝까지 돈 지오반니를 쫓아다니며 “나에게 돌아와 주면 잘못한 거 다 용서해 줄게요”라고 호소하는 여자가 부지기수였다.   돈 지오반니는 약혼자가 있는 하녀 체를리나를 꼬일 때도 유혹의 기술을 구사했다.   “나 같이 기품 있는 신사가 너의 그 고상한 얼굴을 그런 놈이 만지게 놔둘 것 같으냐?”   “너는 농사꾼 마누라가 되기에는 아까운 여자야.”   “너한테 어울리는 팔자는 따로 있어. 내가 팔자를 고쳐 주마.”   이런 감언이설로 체를리나를 꼬인 후 함께 이중창을 부르는데 그것이 그 유명한 ‘손을 잡고 함께 가요’이다.   처음에 체를리나는 약혼자인 마제토에게 미안해서 어쩌냐며 망설인다. 그러다가 혹시 귀족 부인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그만 홀랑 넘어가고 만다. 그러면서도 일말의 양심은 있었는지 “이렇게 쉽게 무너지다니” 하면서 자책한다. 하지만 돈 지오반니의 음흉한 계획은 그에게 버림받은 돈나 엘비라가 갑자기 나타나는 바람에 실패하고 만다. 돈 지오반니로서는 그렇게 아쉬울 수가 없을 것이다. 다 된 밥에 코를 빠뜨렸으니 말이다. 진회숙 / 음악평론가음악으로 읽는 세상 지오반니 사실 여자 농사꾼 마누라 진짜 기술자

2024-07-08

[음악으로 읽는 세상] 독일 가곡 ‘송어’

독일 가곡 ‘송어’는 크리스티안 슈바르트라는 시인의 시에 슈베르트가 곡을 붙인 것이다. 한 남자가 시냇가에서 송어가 헤엄치는 모습을  바라보고 있다. 그때 낚시꾼이 송어를 잡기 위해 낚싯대를 들고 나타난다. 하지만 그는 물이 너무 맑아서 낚시꾼이 송어를 잡을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한동안 물속을 노려보던 그 도둑놈이 갑자기 흙탕물을 일으킨다. 그러자 순식간에 송어가 사기꾼의 낚싯대에 매달려 올라온다. 그는 화가 잔뜩 나서 그 광경을 바라본다.   낚시꾼을 도둑놈·사기꾼이라고 부르는 것이 이상하겠지만, 이것은 일종의 비유다. 송어는 젊은 아가씨를, 낚시꾼은 음흉한 남자를 의미한다. 거울같이 맑은 시냇물에서 젊은 아가씨들이 세상 물정 모르고 즐겁게 놀고 있다. 그 해맑은 모습에 반한 남자가 흑심을 품고 이들에게 접근한다. 하지만 물이 너무 맑아서 아가씨들을 낚을 수가 없다. 그러자 남자가 머리를 굴린다. 흙탕물을 일으켜 시야를 흐려놓는 것이다. 그 순간 송어들이 낚싯대에 줄줄이 걸려서 올라온다. 그 광경을 바라보던 사람은 낚시꾼을 도둑놈·사기꾼이라고 부르며 분노한다.   슈바르트의 시 ‘송어’는 본래 4절까지 있었다. 그런데 어찌 된 일인지 슈베르트는 이 중 3절까지에만 곡을 붙였다. 하지만 이 시의 핵심은 슈베르트가 빠뜨린 4절에 있다.   “젊음을 지키기 위해 황금 같은 시간을 허비하고 있는 그대들! 송어를 생각해 보라. 위험에 빠졌을 때는 서둘러 도망가야 하는 법. 지혜가 부족한 젊은 아가씨들이여! 낚싯대를 들고 유혹하는 자들을 조심하라. 피를 흘렸을 때는 이미 때가 늦으리니.”   사람을 만나다 보면 상대방의 속임수, 즉 흙탕물에 눈이 멀어 올바른 판단을 내리지 못할 때가 있다. 그럴 때 슈베르트의 ‘송어’를 생각하자. 이 경쾌한 노래가 우리에게 선사하는 삶의 지혜를. 뒤늦게 후회하지 말고 서둘러 도망가자! 진회숙 / 음악평론가음악으로 읽는 세상 가곡 송어 송어가 사기꾼 순간 송어들 그때 낚시꾼

2024-07-01

[음악으로 읽는 세상] 사랑은 자유로운 새

치명적인 매력으로 남자를 유혹해 파탄에 이르게 하는 요부나 악녀를 팜므 파탈이라고 한다. 비제의 오페라 ‘카르멘’의 주인공 카르멘은 전형적인 팜므 파탈이다. 그녀는 순진한 청년 돈 호세를 유혹하기 위해 ‘하바네라’를 부른다. “사랑은 자유분방한 새. 그 누구도 길들일 수 없어요. 일단 거절하기로 마음 먹으면 불러봤자 아무 소용없어요.”   하바네라는 2/4 박자의 춤곡으로 특징적인 3-3-2 패턴의 리듬을 가지고 있다. 이 리듬이 매우 관능적인 느낌을 준다. 가슴 깊숙이 눌러 놓았던 본능을 깨우는 리듬이라고나 할까. 윤리나 도덕에 얽매인 남자를 무장해제 시키는 리듬, 남자로 하여금 기꺼이 자기 넥타이를 풀게 만드는 리듬이다.   비제가 팜므 파탈의 전형인 카르멘이 부르는 노래를 하바네라로 한 것은 선택이 아닌 필수였다. 사실 서유럽을 중심으로 한 클래식 음악 양식은 인간의 본성과 관능을 적나라하게 표현하는 데에 적합한 양식이 아니었다.  인간의 감정을 날 것 그대로 표현하기에는 너무 고상하다고 해야 할까. 인간의 감정을 절절하게 표현하고 싶었던 낭만주의 작곡가들에게는 이게 불만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스페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이 나라에는 인간의 본능을 밑바닥부터 흔들어 놓는 무수한 춤곡들이 있기에. 하바네라도 그중 하나였다.   카르멘은 하바네라로 돈 호세를 유혹하면서 자기의 사랑이 위험할 수 있다는 것을 경고한다. 그런데도 돈 호세는 속수무책으로 카르멘에게 빨려 들어간다. 하지만 카르멘은 나중에 돈 호세를 버리고 다른 남자에게로 간다. 돈 호세는 카르멘의 사랑을 갈구하지만, 그녀는 이를 단호하게 거절한다. 그가 자기를 죽일 것을 뻔히 알면서도 끝내 그를 거부한다. 결국 카르멘은 돈 호세의 칼을 맞는다. 마지막까지 자유로운 영혼의 소유자로 살다 간 것이다. 진회숙 / 음악평론가음악으로 읽는 세상 사랑 주인공 카르멘 리듬 남자 팜므 파탈

2024-06-24

[음악으로 읽는 세상] 휴대폰을 즐기자

요즘 음악회에 가면 공연 시작 전에 꼭 듣는 소리가 있다. 소지하고 있는 휴대폰의 전원을 꺼달라는 안내 방송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끔 공연 도중 휴대폰이 울리는 불상사가 발생하곤 한다. 이에 대한 연주자의 반응은 제각각이다. 휴대폰이 울리거나 말거나 연주를 계속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즉시 연주를 멈추고 소리가 난 쪽을 한동안 째려보는 사람, 더 나아가 소리를 낸 사람에게 볼멘소리를 하는 사람도 있다.   이보다 유머 감각이 있는 연주자는 이 상황을 재치있기 해결한다. 연주를 멈추고 “여보세요”라고 전화 받는 시늉을 하기도 하고, 한발 더 나아가 상대방과 진짜 전화 통화를 하는 것처럼 애드립을 하기도 한다. 또한 음악적 센스를 발휘해 휴대폰 소리를 그대로 악기로 연주하는 경우도 있다.   2014년 5월 10일, 미국 뉴욕의 링컨 센터에서는 ‘음악의 방해꾼’이라는 이색적인 제목의 연주회가 열렸다. 여기서는 짐 데이비드가 작곡한 ‘아이 캐논’이라는 곡이 연주되었다. ‘아이 캐논’은 마림바가 연주하는 애플 아이폰의 기본 벨 소리를 모티브로 하고 있다. 마림바가 연주하는 이 모티브는 짧지만 발랄하다. 통통 튀는 듯 생동감이 있다. 처음에 마림바가 이 모티브를 연주했을 때, 관객들의 얼굴에 반가운 기색이 역력했다. 평소에 익히 듣던 소리니까. 휴대폰 벨 소리가 음악이 될 수 있다니 정말 신기하네. 이런 표정이었다. ‘아이 캐논’의 아이폰 모티브는 악기를 옮겨가며 계속 반복된다. 그런데 이게 은근히 중독성이 있다. 자꾸 들어도 또 듣고 싶은 생각이 든다.   이제 휴대폰은 더 이상 음악의 방해꾼이 아니다. 달라진 세상에서 새로운 음악의 소재를 제공해 주는 고마운 존재일 뿐이다. 지금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앞으로도 휴대폰은 음악의 가능성을 무한대로 넓혀주는 역할을 할 것이다. 그러니 이제 휴대폰을 탓하지 말고 휴대폰을 즐기자! 진회숙 / 음악평론가음악으로 읽는 세상 휴대폰 휴대폰 소리 요즘 음악회 즉시 연주

2024-0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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