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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으로 읽는 세상] 광대여 그 슬픔을 웃어라

자신이 처한 현실과 상관없이 우스꽝스러운 옷을 입고 관객을 웃겨야 하는 것이 광대의 운명이다. 레온카발로의 오페라 ‘광대’는 이런 애환을 그린 오페라다. 주인공 카니오는 유랑극단의 광대이다. 그에게는 네다라는 아름다운 아내가 있다. 하지만 네다는 실비오라는 남자와 바람을 피우고 있고, 이번 공연이 끝나면 실비오와 함께 도망칠 계획을 세우고 있다. 카니오는 아내의 불륜을 의심하고 있지만, 그 상대가 누구인지 아직 모른다. 그래서 네다에게 연인의 이름을 대라고 다그치지만, 네다는 끝내 이름을 말하지 않는다.   드디어 공연이 시작되었다. 공교롭게도 네다와 카니오가 출연한 공연의 내용이 그들의 상황과 비슷하다. 네다가 맡은 컬럼비나 역은 남편을 배신하고 다른 남자와 바람을 피우는 역이다. 연극이 진행되는 동안 카니오는 극 중 상황과 실제의 상황을 혼동한다. 그래서 컬럼비나가 정부 아르레치노에게 “나는 항상 당신의 것이에요”라고 말하는 순간 이성을 잃고 만다.   카니오는 무대에 등장해 네다에게 애인의 이름을 말하라고 윽박지른다. 그러나 네다는 자신은 절대로 말하지 않을 것이라고 외친다. 분노한 카니오는 칼로 네다를 찌른다. 네다는 죽어가면서 “도와줘요, 실비오”라고 말하고, 그제서야 실비오가 정부라는 것을 안 카니오는 실비오도 칼로 찔러 죽인다. 그리고는 객석을 향해 이렇게 외친다. “희극은 끝났소.”   이것은 정녕 희극일까? 아니면 희극의 외피를 입은 비극일까? 어쩌면 둘 다 일지도 모른다. 광대라는 존재 자체가 그런 것이니까. 카니오가 부르는 ‘의상을 입어라’는 이런 광대의 처지를 토로한 것이다. “이제 공연이 시작된다. 의상을 입어라. 그리고 얼굴에 분칠을 해라. 아! 웃어라! 광대여! 그대의 깨어진 사랑을! 네 가슴을 쓰라리게 하는 그 슬픔을 웃어라!” 진회숙 / 음악평론가음악으로 읽는 세상 광대 슬픔 이번 공연 입고 관객 존재 자체

2024-05-06

[음악으로 읽는 세상] 음악이 희망을 줄까?

마크 허먼 감독의 ‘브래스트 오프’는 생존의 마지막 수단을 박탈당한 사람들이 처한 가혹한 현실과 뼈저린 절망을 담은 영화다. 영화의 시간적, 공간적 배경은 1992년 영국의 한 탄광촌이다. 폐광 위기에 처한 그림리 탄광에는 100여 년의 전통을 자랑하는 브라스 밴드가 있다. 광산이 문을 닫으면 밴드 역시 해체될 운명이지만 그럼에도 그림리 탄광 밴드는 브라스 밴드 전국 대회에 출전한다. 그리고 준결승에서 우승을 차지해 런던의 로열 앨버트에서 열리는 결승대회에 참가할 자격을 얻게 된다.   광부들이 승리감에 도취해 웃고 떠들며 마을로 돌아온 날, 그들 앞에 충격적인 소식이 날아온다. 폐광이 최종적으로 결정됐다는 소식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림리 탄광 밴드는 로열 앨버트 홀에서 열리는 최종 결선에 참가한다. 여기서 이들이 선택한 곡은 로시니의 ‘윌리암 텔 서곡’이다. 이 곡은 모두 네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이들이 영화에서 연주한 대목은 제4부 ‘스위스군의 행진’이다. 스위스군의 행진은 트럼펫의 팡파르로 화려하게 시작한다. 씩씩하게 행진하는 스위스 군인들의 모습과, 그것을 바라보는 군중들의 흥분된 모습을 생생하게 그리고 있다.   로시니의 ‘윌리암 텔 서곡’은 스위스 판 ‘시련과 극복’의 드라마다. 시련의 끝에는 당연히 승리가 찾아온다. 그래서 그런지 피날레는 신나고 멋지다. 팡파르는 듣는 사람의 마음을 흥분시킨다. 도저히 가만히 앉아 있을 수 없도록 만든다. 하지만 그뿐이다. 희망찬 음악을 연주한다고 해서, 전국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한다고 해서 무엇이 달라지랴. 화려한 음악이 끝나고 나면, 깊고 어두운 현실이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그러니 우리, 음악이 희망을 가져다 줄 것이라 과신하지 말자. 그것은 어디까지나 영화에서나 가능한 얘기일 뿐이다. 진회숙 / 음악평론가음악으로 읽는 세상 음악 희망 우리 음악 그림리 탄광 로열 앨버트

2024-04-29

[음악으로 읽는 세상] 현을 위한 아다지오

미국 작곡가 사무엘 바버의 ‘현을 위한 아다지오’는 루스벨트 미국 대통령과 앨버트 아인슈타인의 장례식에서 연주되어 유명해진 곡이다. 이 곡의 연주에는 제1, 제2 바이올린, 비올라, 첼로, 더블베이스가 참여한다. 성부는 제2 바이올린과 첼로 파트가 각각 두 개로 나뉘어져 모두 7성부로 되어 있는데, 일곱 개의 파트가 각자 독립적으로 움직이면서 서로의 움직임에 대응하고 있다. 특징적인 리듬은 없고, 4분음표로 이루어진 단순한 음형들이 끊임없이 이어진다.   여기서 조용하면서도 풍부한 표정의 주제 선율은 영원한 시간의 흐름을 환기시킨다. 처음도 없고 끝도 없이 그렇게 끊임없이 흘러간다. 가만히 듣고 있으면 여러 파트의 음들이 아주 느린 속도로 우주공간을 유영하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든다. 이렇게 유영하다가 때로는 같은 음으로 합쳐지기도 하고, 때로는 서로 합쳐져서 두터운 화음을 이루기도 한다. 처음에 낮은 곳에서 조용히 시작된 이들의 유영은 아주 느린 속도로 점점 고도를 높여가기 시작한다.   그러다가 드디어 클라이맥스에 이르러 모든 음들이 유영을 멈추고 한 곳에서 날카롭고 투명한 화음으로 만난다. 그리고 클라이맥스 뒤에 곧 숨 막힐 듯 날카로운 침묵이 이어지고, 이렇게 찰라와 같은 침묵이 끝나고 나면 모든 음들이 처음과 비슷한 몸짓으로 느린 여행의 마무리를 짓는다. 음악의 흐름이 마치 아치와 같다. 조용히 시작해 별다른 동요 없이 영원히 지속할 것 같은 느낌을 주면서 조금씩 고조되다가 어느새 클라이막스에 이르고 날카로운 휴지를 거쳐 조용히 사라진다.   ‘현을 위한 아다지오’를 들을 때마다 장례식 음악으로 이 곡만큼 적합한 것이 또 있을까 생각하곤 한다. 음악의 흐름 자체가 우리네 삶과 닮아있기 때문이다. 찬란한 클라이맥스 뒤에 오는 짧은 침묵 그리고 조용히 소멸해 가는 음들. 나도 언젠가는 그런 순간을 맞겠지. 진회숙 / 음악평론가음악으로 읽는 세상 아다지오 장례식 음악 첼로 파트 바이올린 비올라

2024-04-22

[음악으로 읽는 세상] 인생을 바꾼 음악

“한 편의 비디오. 당신의 인생을 바꿀 수도 있습니다.”   과거에 비디오를 틀면 불량, 불법 비디오를 퇴치하자는 캠페인과 함께 이 멘트가 나왔다. 그런데 비단 비디오만 그런 것이 아니다. 세상을 살다 보면 이렇게 인생을 바꾸어놓을 정도로 극적이고 강렬한 영향을 주는 대상을 만날 때가 있다. 그것이 사람일 수도 있고 책이나 영화, 음악, 그림일 수도 있다.   여기 음악 한 곡을 듣고 인생이 완전히 바뀐 사람이 있다. 1965년, 당시 23살의 경영학도였던 길버트 카플란은 뉴욕의 카네기 홀에서 아메리칸 심포니 오케스트라가 연주하는 말러의 교향곡 제2번 ‘부활’을 듣고 큰 충격을 받았다. 이 세상의 소리라고 믿겨지지 않을 정도로 크고 장대한 음향이 카네기 홀을 가득 메우는 순간 그는 수만 볼트의 번개가 온몸을 뚫고 지나가는 듯한 전율을 느꼈다고 한다. 그리고 그 순간 이 음악이 앞으로 평생 자기를 잡고 놓아주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부활’의 열렬한 추종자가 되고 난 후, 카플란은 스스로 이 곡을 지휘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마흔이 넘은 나이에 지휘 공부를 시작했다. 그리고는 1982년 아메리칸 심포니 오케스트라와 함께 평생의 소원이던 ‘부활’을 지휘하게 되었다. 처음에는 이것으로 끝낼 생각이었다. 어쨌든 소원을 풀었으니까. 그런데 그 후 여기저기서 제의가 들어왔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그는 그 후 ‘부활’만 전문적으로 지휘하는 아마추어 지휘자로 활동하게 되었다.   카플란은 금융전문지의 발행인이자 월스트리트에서 성공한 사업가였다. 아마 별일 없었으면 그는 평생 금융맨으로 세상을 살다 갔을 것이다. 그런데 어느 날 우연히 들었던 음악 한 곡으로 완전히 인생이 바뀌게 되었다. 그 곡이 바로 말러의 ‘부활’이다. 궁금한 사람은 한 번 들어 보시라. 그러면 카플란이 느꼈던 전율이 어떤 것인지 알게 될 것이다. 진회숙 / 음악평론가음악으로 읽는 세상 인생 음악 영화 음악 여기 음악 아마추어 지휘자

2024-04-15

[음악으로 읽는 세상] 베니스에서의 죽음

1971년에 나온 비스콘티 감독의 ‘베니스에서의 죽음’은 독일의 문호 토마스 만의 동명 소설을 바탕으로 만든 영화다. 작곡가 구스타프는 베니스의 리도 섬으로 여행을 갔다가 그곳에서 마치 그리스 조각처럼 완벽한 아름다움을 지닌 소년을 보고 한순간에 매료되고 만다. 평생 아폴로적인 절제와 금욕을 최고의 덕목으로 알고 살았던 예술가가 디오니소스적인 욕망에 속수무책으로 내몰린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섬에 전염병이 찾아와 소년의 가족이 섬을 떠난다는 소식을 듣는다. 다시는 소년을 볼 수 없다는 절망에 휩싸인 구스타프는 이발사를 찾아가 흰머리를 검은색으로 물들이고, 얼굴에 하얗게 분칠을 한다. 입술에는 빨간 연지도 바른다. 늙은 얼굴을 가린 채 소년의 주변을 맴돈다.   영화의 주제음악은 구스타프 말러의 교향곡 제5번의 4악장 아다지에토다. 처연하고 비극적인 느낌의 이 느린 악장은 집요하게 죽음을 이야기한다. 이 악장에서 말러는 오로지 현악기만 사용했는데, 그 소리가 그렇게 비장하고 처연할 수가 없다. 인간 존재의 실존적 의미, 젊음의 소멸과 죽음에 대해 생각하게 만든다.   멀리서 검은 구름이 밀려오듯 현악기의 처연한 음색이 점점 소리의 강도를 높여 간다. 그 장면에서 남자는 죽음을 맞는다. 그의 얼굴에서 땀이 흘러내린다. 머리와 눈썹, 얼굴과 입술을 물들인 염색약과 화장품이 땀으로 범벅된다. 그 추한 모습은 되돌릴 수 없는 젊음을 화장으로 감추려 했던 남자의 소망이 얼마나 부질없는 짓인가를 처절하게 보여준다.   소년의 모습이 점점 멀어지는 동안 구스타프의 삶도 서서히 꺼져 간다. 갑자기 현기증이 밀려온다. 멀리 사라져 가는 소년을 따라가려고 자리에서 일어나는 순간, 구스타프는 그 자리에 쓰러지고 만다. 소년과의 이별이 곧 육신의 죽음이자 정신의 죽음이 된 것이다. 진회숙 / 음악평론가음악으로 읽는 세상 베니스 죽음 소멸과 죽음 구스타프 말러 작곡가 구스타프

2024-04-01

[음악으로 읽는 세상] 마태수난곡

독일 라이프치히의 성 토마스 교회에 봉직하고 있던 J S 바흐는 1729년 역사에 길이 남을 ‘마태수난곡’을 작곡했다. 그 시절 독일 교회에서는 매년 성 금요일이 되면 그리스도의 수난을 소재로 한 수난곡을 연주했다. 수난 주간이 되면 다른 음악활동이 금지되기 때문에 당시 사람들에게는 수난곡을 듣는 것이 유일한 음악행사였으며, 따라서 이 곡에 쏠리는 사람들의 기대도 대단했다.     당시 ‘마태수난곡’은 예수의 수난을 다룬 마태복음의 내용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장대한 음악 서사시이다. 예수를 체포하기 위해 음모를 꾸미는 것에서부터 최후의 만찬, 예수의 예언, 겟세마네 동산에서의 기도, 예수의 체포, 대제사장 앞에서의 굴욕, 베드로의 부인, 유다의 죽음, 빌라도의 심판, 사형선고,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 숨을 거두는 예수, 무덤에 묻히는 예수까지의 이야기가 담겨 있다. 바흐는 3년 동안의 작업을 거쳐 이 인류 최대의 드라마를 기악 반주를 동반한 합창과 독창, 중창으로 펼쳐 보였다. 모두 78곡, 전곡의 연주시간만 해도 세 시간에 달하는 대작이다.   ‘마태수난곡’은 흔히 종교음악의 하나로 분류된다. 하지만 예수의 고난과 죽음을 다룬 이 인류 최대의 서사시에서 나는 신의 목소리보다는 인간의 목소리를 듣는다. 죽음을 눈앞에 둔 예수의 인간적인 고뇌, 예수를 팔아먹은 유다와 예수를 세 번 씩이나 부인한 베드로, 그리고 이 사건에 대해 각자의 이해관계에 따라 다른 입장과 태도를 보이는 인간 군상들. 신과 인간, 성(聖)과 속(俗), 영혼과 육체, 믿음과 배신. 이 모든 인간적인 것을 담고 있는 한 편의 거대한 휴먼 드라마이다.   ‘마태수난곡’을 들을 때마다 바흐가 얼마나 위대한 작곡가인지를 절감하곤 한다. 그래서 자칫 사장될 뻔한 이 작품을 발굴해 세상에 널리 알린 멘델스존이 그렇게 고마울 수가 없다. 진회숙 / 음악평론가음악으로 읽는 세상 마태수난곡 예수 무덤 만찬 예수 기도 예수

2024-03-25

[음악으로 읽는 세상] 나비부인

푸치니의 오페라 ‘나비부인’은 음악적으로 대단히 훌륭한 작품이다. 하지만 그 내용은 편안하게 즐길 만한 것이 못 된다. ‘나비부인’은 일본의 나가사키 항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핑커톤이라는 미군 장교와 일본인 게이샤 초초상의 비극적 사랑을 그린 오페라다. 동양 여자가 자신을 희생하며 맹목적으로 서양 남자를 사랑하는 이야기는 서양 사람들에게는 판타지일 수 있지만, 우리 같은 동양인에게는 별로 유쾌한 이야기가 못 된다.   미군 장교 핑커톤은 백인 우월주의에 사로잡혀 있는 전형적인 서양 남자다. 나가사키 항에 내린 그는 배가 새로운 도시에 닿을 때마다 늘 그랬던 것처럼 ‘데리고 놀’ 여자를 구한다. 일본인 포주는 그에게 어떤 여자든지 마음에 드는 여자를 단돈 100엔에 살 수 있다고 장담한다. 이 음흉한 남자들의 행각에 걸려든 것이 바로 초초상이라는 게이샤다. 핑커톤은 그녀와 장난삼아 결혼하지만 초초상의 사랑은 장난이 아니었다. 그녀는 핑커톤과의 사랑에 목숨을 걸었다.   핑커톤은 잠시 초초상을 데리고 놀다가 다시 배를 타고 나가사키 항을 떠났다. 그 후 핑커톤의 아들을 낳은 초초상은 하염없이 그를 기다린다. 하지만 그것은 헛된 기다림이었다. 핑커톤은 본국으로 돌아가 다른 여자와 정식으로 결혼을 한다. 핑커톤이 본부인을 대동하고 자기 앞에 나타났을 때, 초초상은 진실을 알게 된다. 삶의 희망을 잃은 그녀는 어린 아들을 남겨둔 채 단도로 자기 가슴을 찔러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초초상은 아리아 ‘어떤 갠 날’에서 핑커톤이 “나의 버터플라이!”라고 부르며 자기에게 돌아오는 날을 상상한다. 그렇게 한동안 달콤한 꿈을 꾼 다음 그가 반드시 돌아올 것이라고 외치며 노래를 끝낸다. 하지만 나에게는 이 외침이 처절한 절규처럼 들린다, 그 사랑이 곧 파국으로 끝날 것을 알기 때문이다. 진회숙 / 음악평론가음악으로 읽는 세상 나비부인 게이샤 초초상 서양 남자 동양 여자

2024-03-18

[음악으로 읽는 세상] 그레고리 성가

그레고리오 성가는 중세 시대부터 가톨릭교회의 예배의식에서 사용되던 단선율의 전례음악이다. 그런데 이 성가를 들으면 우리는 그 안에 있는 것보다 ‘없는’ 것에 더 충격을 받는다. 그레고리오 성가는 남성 성가대가 라틴어 가사로 된 단선율의 노래를 반주 없이 부르는 것이 특징이다. 화음도 없고 반주도 없고, 일정한 박자도 없으며, 멜로디의 굴곡도 없다. 선율의 흐름은 유연하고 유동적이다. 박자 기호나 마디의 구분이 없이 산문의 자연스러운 리듬에 따라 흘러간다. 갑자기 높은 음이나 낮은 음으로 내려가는 도약진행은 아주 드물고, 대개의 음들은 순차적으로 진행된다. 최고음에서 최저음까지 음역이 한정되어 있어 일정한 음역 안에서만 멜로디가 움직인다. 변화무쌍한 음악에 길든 요즘 우리 귀에는 조금 지루하게 들린다. 듣다 보면 모두 그 음악이 그 음악 같다.   그레고리오 성가는 지극히 형식적이고 객관적인 음악이다. 음악 자체의 아름다움이나 예술적 감동을 추구하지 않는다. 감각적인 것을 거부함으로써 세속 음악과의 경계를 분명히 하고, 이것이 인간의 음악이 아닌 신의 음악이라는 사실을 언제나 일깨워준다. 과도한 장식을 지양하고, 모든 것을 가능한 한 단순하게 표현하려고 하는 노력은 그 안에 깃든 정신적 내용이 더욱 풍부하게 드러나도록 하는  효과를 가져왔다.   하지만 교회가 부유해지고 타락하면서 그레고리오 성가에 깃든 풍부한 정신성은 사라지게 되었다. 중세를 배경으로 한 영화 ‘장미의 이름’에는 이렇게 영혼은 사라지고 공허한 형식만 남은 그레고리오 성가의 처지를 상징하는 장면이 나온다. 수사들과 마을 처녀의 화형이 집행될 때, 형장에 무리 지어 있는 수사들이 그레고리오 성가를 부르는 장면이다. 여기서 수사들은 아무런 감정도 느낌도 없는 목소리로 성가를 부른다. 그 무미건조한 울림에서 우리는 중세 교회에 드리워진 절망의 그림자를 읽는다. 진회숙 음악평론가음악으로 읽는 세상 그레고리 성가 그레고리 성가 남성 성가대 세속 음악과

2024-03-11

[음악으로 읽는 세상] 백조의 노래

백조는 죽기 전에 마지막으로 한 번만 노래를 부른다고 한다. 그래서 위대한 작곡가들의 마지막 작품은 흔히 백조의 노래에 비유되곤 한다.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가곡 ‘네 개의 마지막 노래’는 슈트라우스가 부른 백조의 노래였다. 모두 네 곡으로 이루어진 이 작품의 마지막 곡은 아이헨도르프의 시에 곡을 붙인 ‘황혼에’이다.   “그동안 우리는 슬픔도, 기쁨도 손을 맞잡고 견디어 왔다. 이제 방황을 멈추고 저 높고 고요한 곳에서 안식을 누리리.” 이렇게 시작하는 첫 구절에 노래의 주제가 압축돼 있다. 여기서 ‘잠’은 ‘죽음’을 의미하는 듯하다. “곧 죽음이 찾아오리니 그리하면 외로움 속에 길 잃을 일이 더 이상 없으리”라는 구절이 암시하는 듯 죽음은 또한 ‘평화’를 의미하기도 한다.   후반부에 소프라노가 장대한 오케스트라 반주에 맞추어 드높은 목소리로 “오! 장대하고 고요한 평화여! 그토록 심오한 황혼이여!”라고 노래하는데, 이 부분을 들으면 일종의 전율 같은 것이 느껴진다. 노래와 오케스트라의 장대한 외침이 깊고 강렬한 여운을 남긴다. 자기 앞에 놓인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슈트라우스는 이렇게 다가올 죽음을 찬양했다. 지극히 장대하고, 엄숙한 울림으로.   그는 곡을 이렇게 맺는다. “방랑에 지쳐버린 우리. 이것이 혹시 죽음이 아닐까?” 본래 원시에는 “저것이 혹시 죽음이 아닐까?”라고 돼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슈트라우스가 ‘저것이’를 ‘이것이’로 바꾸어 놓은 것이다. 당시 슈트라우스는 죽음을 멀리 떨어져 있는 것(저것)이 아니라 자신에게 아주 근접해 있는 것(이것)으로 느끼고 있었던 듯하다.   슈트라우스는 이 작품이 공연되는 것을 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생을 마감하는 바로 그 순간에 그는 아마 자신이 부른 백조의 노래가 먼 후세 사람들에게 이토록 깊은 감동으로 다가가리라는 것을 짐작하지는 못했으리라. 진회숙 / 음악평론가음악으로 읽는 세상 백조 노래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당시 슈트라우스 오케스트라 반주

2024-03-04

[음악으로 읽는 세상] 음악을 통한 화해와 공존

세계적인 지휘자 다니엘 바렌보임은 1999년, 팔레스타인 출신의 문명 비평가 에드워드 사이드와 함께 아랍국가와 이스라엘 젊은이들로 구성된 서동시집 오케스트라를 창단했다. ‘서동시집’이라는 이름은 독일 시인 괴테가 페르시아 시인 하피즈의 시를 읽고 감명을 받아 집필한 ‘서동시집(West-Eastern Divan)’에서 따 온 것이다.   그 전까지 서양 사람들은 동방 문화가 서양 문화보다 열등하다는 편견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괴테는 하피즈를 통해 동방의 가치를 새롭게 발견했고, 그 결과 동서양의 문학양식을 이상적으로 결합한 ‘서동시집’을 세상에 내놓게 되었다. 서동시집 오케스트라라는 이름은 괴테가 구현하고자 했던 동서양 화합의 정신을 계승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이 오케스트라는 이스라엘, 시리아, 이집트, 레바논, 쿠웨이트, 팔레스타인 등 각기 다른 종교와 문화, 언어, 정치적 신념을 가진 젊은이들로 구성되어 있다. 이들이 하는 일은 세계 여러 지역을 돌며 음악을 통한 평화와 화합의 메시지를 전하는 일이다.   지난 2005년, 서동시집 오케스트라는 팔레스타인의 임시수도 라말라에서 연주회를 가졌다. 연주 곡목은 차이콥스키의 교향곡 5번과 베토벤의 ‘운명’이었다. 이때 젊은 연주자들은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그토록 어려운 상황에서도 음악에 깊이 감동을 받고 따뜻한 박수를 보낸다는 사실에 큰 인상을 받았다. 그 전까지 팔레스타인 사람하면 테러나 일삼는 괴물 집단으로 생각했는데, 막상 와 보니 그들도 자기들과 똑같은 사람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 것이다.   이들을 묶어 준 것은 물론 음악이었다. 바렌보임은 이스라엘 사람들과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서로 싸우지 말고 평화롭게 살아가자는 것이 연주회의 취지라고 말했다. 하지만 그로부터 20여년이 흐른 지금도 두 나라간의 갈등은 계속되고 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진회숙 / 음악평론가음악으로 읽는 세상 음악 화해 서동시집 오케스트라 팔레스타인 출신 동서양 화합

2024-02-26

[음악으로 읽는 세상] 기회를 잡은 지휘자

기회는 준비된 자에게만 오는 법이다. 우리가 잘 아는 음악가 중에는 그 기회를 잘 잡아 성공한 사람들이 있다. 이탈리아 출신 지휘의 거장 토스카니니가 그렇다. 토스카니니는 ‘무대 위의 독재자’로 불렸다. 자신이 원하는 완벽한 소리를 얻기 위해 연주자들을 혹독하게 다루었으며, 그 과정에서 어떤 전횡도 서슴지 않았다. 불같은 성격을 주체하지 못해 늘 사람들과 마찰을 빚었는데, 이 문제에 대해서는 스스로도 “나는 노인이다. 그런데 신은 왜 열일곱 소년의 피로 나를 괴롭히는 걸까?”라고 한탄했다고 한다.   토스카니니의 원래 전공은 지휘가 아닌 첼로였다. 이런 그가 지휘자로 데뷔하게 된 데는 재미있는 사연이 숨어 있다. 1886년, 당시 19살이었던 토스카니니는 이탈리아의 흥행사 클라우디오 롯시가 조직한 오페라단의 첼리스트 겸 부합창지휘자로 브라질 공연에 참여했다. 공연작은 베르디의 오페라 ‘아이다’였다. 그런데 공연 직전에 오페라단 측과 마찰을 빚은 지휘자가 무책임하게 지휘를 하지 않겠다고 선언하는 황당한 사태가 발생했다. 갑작스러운 사태에 당황한 주최 측은 서둘러 다른 사람을 물색했다.   이때 단원들이 토스카니니를 추천했다. 평소 지휘에 대해 엄청난 열정을 가지고 있었던 그는 ‘아이다’를 비롯한 여러 편의 오페라를 통째로 외우고 있었다. 리허설도 없이 당장 공연을 해야 하는 상황에서 악보를 모두 외우고 있는 그가 지휘자로 낙점된 것이다. 관객들은 19살짜리 애송이가 지휘대에 오르자 큰 소리로 야유를 퍼붓기 시작했다. 하지만 리허설 한 번 하지 못한 이 젊은 지휘자는 ‘아이다’를 모두 외워서 한 치의 실수도 없이 공연을 이끌어나갔다. 그러는 사이 청중의 웅성거림은 감탄으로 바뀌었다. 공연이 끝났을 때, 객석에서 우레와 같은 박수가 터져 나왔다. 지휘의 거장 토스카니니의 신화가 막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진회숙 / 음악평론가음악으로 읽는 세상 지휘자 기회 부합창지휘자로 브라질 거장 토스카니니 이탈리아 출신

2024-02-19

[음악으로 읽는 세상] 음악으로 자유를 꿈꾸다

영화 ‘쇼생크 탈출’에는 아주 인상적인 장면이 나온다.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갇힌 앤디라는 주인공이 교도소에 설치된 스피커를 통해 모차르트의 오페라 ‘피가로의 결혼’에 나오는 ‘편지의 2중창’을 트는 장면이다. 사실 이 장면의 길이는 3분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그런데도 보는 사람에게 강렬한 인상을 남긴다.   어느 날 우연히 간수의 방에서 모차르트의 ‘피가로의 결혼’이 실린 음반을 발견한 앤디는 문을 걸어 잠그고 음반을 틀어 교도소 전역에 설치된 스피커를 통해 ‘편지의 이중창’이 흘러나오도록 한다. 갑자기 노래가 흘러나오자  죄수들은 하던 일을 멈추고 노랫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아름다운 음악에 마치 최면에 걸린 듯 그 자리에 멈춰 서버린 죄수들의 모습을 배경으로 앤디의 감방 동료인 레드의 독백이 흘러나온다.   “나는 지금도 그때 두 이탈리아 여자들이 무엇을 노래했는지 모른다. 사실 알고 싶지도 않았다. 때로는 말하지 않는 것이 최선인 경우도 있는 법이다. 노래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다웠다. 그래서 가슴이 아팠다. 이렇게 비천한 곳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높고 먼 곳으로부터 새 한 마리가 날아와 우리가 갇혀 있는 삭막한 새장의 담벽을 무너뜨리는 것 같았다. 그 짧은 순간, 쇼생크에 있는 우리 모두는 자유를 느꼈다.”   인간은 본래 자유로운 존재이기에 세상 모든 감옥으로부터의 탈출을 꿈꾼다. 여기서 모차르트 음악은 자유의 또 다른 이름이다. 사람들은 앤디의 육체는 가둘 수 있었지만, 그의 머릿속에 있는 모차르트 음악까지 가둘 수는 없었다. 감옥에서 모차르트의 아름다운 선율을 머리 속으로 되뇌며 앤디는 탈출을 꿈꾸었다. 모차르트 음악이 있었기에 희망을 가질 수 있었다. 음악과 함께 앤디의 자유로운 영혼은 교도소 담장을 넘어 저 먼 하늘까지 날아올랐다. 진회숙 / 음악평론가음악으로 읽는 세상 음악 자유 모차르트 음악 쇼생크 탈출 교도소 전역

2024-02-12

[음악으로 읽는 세상] 벼락부자 풍자 ‘서민 귀족’

태양왕 루이 14세가 군림하던 시절, 프랑스 궁정은 유럽에서 가장 사치스러운 곳이었다. 그는 파리 근교 베르사유에 거대한 궁전을 짓고, 정사를 보는 틈틈이 사냥과 기마, 트럼프와 당구, 연극과 음악, 발레를 즐겼다. 루이 14세를 중심으로 한 프랑스 궁정의 이 ‘화려하고 떠들썩한 놀이문화’는 그 후 전 유럽 왕가의 모델이 되었다.   당시 이 궁정에서는 작곡가 륄리와 극작가 몰리에르가 손잡고 왕과 귀족들의 화려한 취미생활에 봉사하고 있었다. 륄리와 몰리에르는 오페라와 발레, 연극을 결합한 코미디 발레라는 새로운 양식을 선보였는데, 그 대표작이 바로 유명한 ‘서민 귀족’이다. ‘서민 귀족’은 주르댕이라는 주인공을 통해 부자들의 위선을 풍자적으로 폭로한 코미디 발레의 대표작이다. 주인공 므슈 주르댕은 당시 새롭게 부상한 신흥 중산층, 말하자면 ‘벼락부자’다. 돈은 많지만 평민에 불과한 그는 자신의 재력에 맞는 품위를 갖추겠다는 야심 찬 포부를 안고 음악, 무용, 검술, 철학 선생 등을 고용해 귀족의 생활을 배운다. 하지만 워낙 무식한 탓에 그 과정에서 온갖 해프닝이 벌어진다.   그의 딸 루씰은 클레몽트라는 청년과 결혼하려고 하지만 주르댕은 그가 평민이라는 이유로 허락하지 않는다. 그러자 클레몽트는 튀르키예 왕자로 분장해 주르댕 앞에 나타난다. 그는 엉터리 튀르키예 말을 하고 엉터리 터키식 종교의식을 치르지만, 무식한 주르댕은 그것도 모른 채 자기도 왕족이 되었다고 좋아한다.   사람들이 모두 합심해 주르댕을 속이며 엉터리로 튀르키예식 종교의식을 치르는 우스꽝스러운 장면에서 륄리의 ‘튀르키예 의식을 위한 행진곡’이 연주된다. 여기서는 대사, 음악, 연기, 연주 모든 것이 우스꽝스럽게 과장되어 있다. 배우들도, 악사들도 과장된 몸짓으로 깔깔거리며 연기하고 연주한다. 부자들의 허위의식을 까발린 그 장면을 볼 때마다 속이 그렇게 통쾌할 수가 없다. 진회숙 / 음악평론가음악으로 읽는 세상 벼락부자 풍자 벼락부자 풍자 서민 귀족 코미디 발레

2024-02-05

[음악으로 읽는 세상] 학살 현장의 피아노 소리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의 영화 ‘쉰들러 리스트’에는 독일군들이 집집마다 돌아다니며 유대인들을 학살하는 장면이 나온다. 집 안 곳곳에서 살육이 벌어지고 있는 동안 다른 방에서는 한 독일군이 피아노를 치고 있다. 그가 연주하는 곡은 J S 바흐의 ‘영국 모음곡’ 제2번의 ‘전주곡’이다. 음악을 연주하는 독일군의 표정에는 아무런 감정의 동요가 없다. 밖에서 벌어지는 광란의 살육과 자기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듯 건조한 얼굴로 피아노를 친다. 이 음악에 맞추어 유대인이 하나둘 죽어나간다. 이들이 지르는 단말마의 비명은 처절하지만, 바흐의 음악은 무심하고 냉정하기만 하다. 서늘한 표정으로 피아노를 치고 있는 독일군이 마치 저승사자처럼 보인다. 사람의 마음을 이토록 황폐하게 만드는 장면이 또 있을까.   바흐의 음악은 견고한 구성과 형식미를 자랑하는 장엄한 건축물과 같다. 마치 수학 문제를 풀듯 치밀한 계산에 의해 음을 구축해 나간다. 바흐의 건반음악 악보에는 셈 여림과 같은 다이내믹을 표시하는 기호가 없는데, 이는 당시 건반 악기인 하프시코드에 이런 기능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바흐의 건반 음악은 객관적이다. 그리고 이런 객관성이 후대에 무수한 주관이 개입할 여지를 주었다. 오늘날 바흐의 건반 음악은 다이내믹의 표현이 가능한 피아노로 연주하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다양한 해석이 가능하다. 같은 곡이라도 건조하게 칠 수도 있고, 따뜻하게 칠 수도 있다.   독일군의 바흐 연주는 건조하기 그지없다. 바로크 시대 본연의 차가운 객관성을 보여준다. 일정한 음형의 연속과 반복으로 이루어진 음악. 바로 옆에서 수많은 사람이 잔인하게 학살당하는데, 바흐의 음악은 애절한 멜로디 하나 없이 형식과 구성의 논리로만 전개된다. 그 무심함이 처절한 비명보다 더 끔찍하다. 진회숙 / 음악평론가음악으로 읽는 세상 피아노 학살 피아노 소리 건반음악 악보 바흐 연주

2024-01-29

[음악으로 읽는 세상] ‘유디트의 승리’

‘사계’의 작곡가 비발디의 본래 직업은 가톨릭 사제였다. 하지만 건강이 나빠 사제의 중요한 임무인 미사를 집전할 수 없었다. 대신 피에타 고아원 부속 음악원의 교사로 일했다. 피에타 음악원은 고아나 사생아 출신의 소녀들을 데려다가 국비로 음악을 가르치는 곳이었다.   비발디가 피에타 음악원 소녀들을 위해 작곡한 곡 중에 ‘유디트의 승리’라는 오라토리오가 있다. 고대 이스라엘의 여인 유디트가 조국을 위해 적장 홀로페르네스를 유혹해 그의 목을 벤다는 줄거리를 가지고 있는데, 이야기 자체는 남자들이 많이 등장하지만 소녀들을 위해 작곡했기 때문에 배역은 모두 여성들이 맡도록 되어 있다.   ‘유디트의 승리’는 아시리아 군인들의 합창으로 시작한다. 내용상으로는 남자군인들이 불러야 하지만 실제로는 여자들이 부른다. 여성이 남자 역할을 해야 하고, 그럼으로써 반감되는 리얼리티를 최대한 살리기 위해 비발디는 악기를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첫 곡 아시리아 군인들의 합창은 힘찬 팀파니 전주로 시작한다. 그런 다음 트럼펫이 시종일관 합창과 함께 화려한 악구를 연주하는데, 이것이 소녀들의 목소리를 보완해주는 역할을 한다.   ‘유디트의 승리’ 전곡을 들어보면 여성의 목소리라는 한계를 극복하는 과정에서 발현된 비발디의 창조력에 경의를 표하게 된다. 음악을 듣다 보면 소녀들을 위해 작곡했다는 사실조차 잊을 정도다.   20세기 최고의 작곡가 이고리 스트라빈스키는 비발디를 ‘같은 곡을 1000개씩이나 써 갈긴 작곡가’라고 혹평했지만, ‘유디트의 승리’를 들어보면 그가 시대를 앞서가는 작곡가였다는 것, 인간의 감성을 소중하게 생각한 휴머니스트였다는 것, 그리고 한계 속에서 오히려 엄청난 창조력을 발휘한 진정한 예술가였다는 것을 보여준다. 비발디는 그렇게 놀라운 음악의 힘으로 한 시대를 풍미했다. 진회숙 / 음악평론가음악으로 읽는 세상 승리 작곡가 비발디 작곡가 이고리 피에타 음악원

2024-01-22

[음악으로 읽는 세상] 오! 사랑하는 아버지

푸치니의 오페라 ‘잔니 스키키’에 나오는 ‘오! 사랑하는 나의 아버지’는 제목만 보면 아버지에 대한 사랑의 마음을 담은 노래처럼 보인다. 제목뿐만 아니라 멜로디도 그렇다. 그 서정적인 멜로디를 듣고 있으면 아버지를 존경과 사랑이 담뿍 담긴 눈으로 바라보는 딸의 모습이 연상된다. 하지만 실제 내용은 이런 상상과는 거리가 멀다. 한 남자와  사랑에 빠진 딸이 아버지에게 결혼이 성사될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간청하면서 이 노래를 부르는데, 그 내용이 거의 협박 수준이다. 그녀는 만약 자기 사랑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강물에 몸을 던지겠다며 아버지를 위협한다. 그리고는 “저는 죽고 싶어요”라는 말로 다시 한 번 아버지의 놀란 가슴에 쐐기를 박는다.   자기 말에 안절부절 못하는 아버지를 보고 딸은 속으로 쾌재를 부른다. “오! 신이여. 저는 죽고 싶어요”라고 노래할 때는 은근슬쩍 그것을 즐기는 것 같은 느낌마저 든다. 마지막에 애원조로 “아빠, 불쌍히 여겨 주세요(Babbo, pieta, pieta)”라고 노래하지만, 사실 베키오 다리에 가서 아르노 강에 몸을 던지겠다는 말을 했을 때부터 이미 결론은 난 것이나 다름없다. 그렇게 아버지의 맹목적인 사랑을 담보로 딸은 자기가 원하는 것을 얻는다.   ‘오! 사랑하는 아버지’에서 “불쌍히 여겨 주세요(pieta)”는 다분히 응석이 섞여 있는 애원이다. 죽겠다는 협박으로 이미 충격에 빠진 아버지에게 살짝 간청의 형식을 갖추기 위한 장치라고나 할까. 단어에 실린 멜로디는 정말로 간절하지만, 오히려 그 간절함에서 과장 연기의 의도가 엿보인다. 그렇게 이 노래는 짐짓 불쌍함을 가장하고 있다. 멜로디는 더 없이 간절하고 서정적이지만, 그 내용은 다분히 의도적이고 계산적이다. 이런 정서와 내용의 충돌이 웃음을 자아낸다. 정서와 내용은 그 충돌이 크면 클수록 더 큰 웃음을 유발하는 법이다. 진회숙 / 음악평론가음악으로 읽는 세상 아버지 사랑 자기 사랑 pieta pieta 과장 연기

2024-01-15

[음악으로 읽는 세상] 브람스를 좋아하세요?

1961년에 개봉된 ‘브람스를 좋아하세요?’라는 영화가 있다. 프랑수아즈 사강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 이 영화에서 24세의 풋풋한 청년 시몽은 폴라라는 연상의 여인을 음악회로 초대하며 “브람스를 좋아하세요?”라고 묻는다. 이때 폴라는 시몽의 데이트 신청을 받아들이지만 두 사람 사이에는 보이지 않는 장벽이 있다. 바로 열다섯 살이라는 나이 차다. 폴라는 시몽이 자기에게 갖는 애정이 순수하게 이성에 대한 관심이 아니라 연상의 여인에게 느끼는 모성애적 관심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다.   이 영화에는 브람스 교향곡 3번 3악장이 배경으로 깔린다. 브람스 교향곡 중에서도 멜로디가 아름답고 로맨틱하기로 유명한 악장인데, 멜로디가 너무 달콤하고 몽환적이어서 얼핏 들으면 브람스 작품이 아닌 것 같다는 생각마저 든다. 그동안 아카데믹하고 선이 굵고 진지한 음악만 써 왔던 브람스에게 이런 사탕발림 같은 달달한 감성이 있었나 놀라울 정도다. 여하튼 그 덕분에 브람스 교향곡 3번 3악장의 주제 선율은 대중음악가들의 사랑을 많이 받았다. 멜로디를 로맨틱 버전, 에로틱 버전 등 다양한 스타일로 편곡해 연주하기도 하는데, 영화에서도 다양한 버전의 3악장이 나온다.   영화에서 흘러나오는 브람스의 멜로디는 로맨틱하지만 현실은 결코 로맨틱하지 않다. 폴라는 시몽의 사랑이 비현실적인 로망에 불과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의 관심이 싫지는 않지만 그녀는 현실을 직시해야 한다. 결국 폴라는 시몽에게 헤어지자고 말한다. 폴라의 갑작스러운 이별 통고에 상처를 받은 시몽이 계단을 뛰어 내려간다. 그때 폴라가 울면서 이렇게 외친다.   “나는 너무 늙었어. 늙었다고.”   영화에서 시시때때로 울려 퍼지는 브람스의 멜로디는 로맨틱한 환상이다. 그러나 환상은 환상으로 있을 때가 가장 아름다운 법이다. 폴라는 그걸 깨달은 것이다. 진회숙 / 음악평론가음악으로 읽는 세상 브람스 브람스 교향곡 브람스 작품 청년 시몽

2024-01-08

[음악으로 읽는 세상] 오페라 ‘살로메’

영국 작가 오스카 와일드의 희곡 ‘살로메’는 데카당스의 진수를 보여준다. 살로메는 성경에 나오는 인물로 헤롯왕에게 세례 요한의 목을 베어 은쟁반에 담아오도록 요구한 엽기적인 팜므 파탈로 알려져 있다. 그동안 수많은 팜므 파탈이 예술작품에 등장했다. 하지만 뭐니뭐니해도 팜므 파탈이 치명적인 매력을 마음껏 발산한 시기는 데카당스 예술이 풍미하던 19세기 말이 아닐까 싶다. 데카당스는 쇠퇴 혹은 퇴폐라고 번역되는데, 난숙기의 예술 활동이 내용이나 형식에서 막다른 골목에 이르러 정상적인 힘을 잃고 지나친 향락주의나 탐미주의에 빠지는 세기말적 징후를 말한다.   독일 작곡가 리하르트 슈트라우스는 오스카 와일드의 ‘살로메’를 오페라로 만들었다. 예술사적으로 볼 때, 와일드의 ‘살로메’가 R 슈트라우스의 음악과 만난 것은 필연이었다. 이 엽기적인 작품에는 어떤 음악이 어울릴까. 사실 낭만주의는 탐미주의와 데카당스로 상징되는 이 세기말 병(病)을 표현하기에는 너무 낡은 도구였다.   이 오페라를 작곡할 당시 R 슈트라우스는 낭만주의를 넘어 모더니즘으로 가고 있었다. 그는 수 세기 동안 서양음악을 지배해 온 조성(調性)의 굴레를 벗어던지고자 했다. 실제로 오페라 ‘살로메’에는 조성이 애매모호한 부분이 많이 나온다. 서로 다른 조성이 동시에 등장해서 충돌하기도 하고, 파격적인 방식으로 조(調)가 바뀌기도 한다. 그렇게 듣기에 불편한 불협화음과 애매모호하고 신비한 화성으로 ‘살로메’의 세기말적 병폐와 탐미적 데카당스를 그렸다.   이탈리아의 오페라 작곡가 푸치니는 슈트라우스로부터 촉발된 음악의 모더니즘을 ‘알프스 저편에서 넘어온 음악의 성병(性病)’이라고 비난했다고 한다. 하지만 그 시절, 이런 ‘음악적 성병’  말고 살로메의 성도착증을 제대로 표현할 수 있는 수단이 과연 있었을까. 진회숙 / 음악평론가음악으로 읽는 세상 오페라 살로메 오페라 작곡가 데카당스 예술 음악적 성병

2023-12-18

[음악으로 읽는 세상] 옴팔레의 스케르초

화가 루벤스가 그린 ‘헤라클레스와 옴팔레’는 헤라클레스와 옴팔레의 관계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이 그림에서 근육질의 헤라클레스는 머리에 여자처럼 띠를 두른 채 옴팔레에게 조롱을 당하고 있다. 헤라클레스의 귀를 잡아당기고 있는 옴팔레의 얼굴에 장난기가 가득하다.   생상스는 비슷한 상황을 ‘옴팔레의 물레’라는 교향시로 작곡했다. 이 곡을 듣고 있으면 헤라클레스를 비웃는 옴팔레의 모습이 연상된다. 음악은 헤라클레스가 돌리는 물레를 연상시키는 모티브로 시작한다. 그리고 옴팔레와 여자들이 헤라클레스를 조롱하는 소리가 들린다. 헤라클레스의 물레는 회전 강도를 높이면서 빙글빙글 돌아가고, 그 모습을 본 옴팔레와 여자들은 키득 키득 웃으며 영웅의 몰락을 즐거워한다. 그렇게 음악은 시종일관 밝고 경쾌하게 흘러간다.   생상스는 이 곡이 신화의 이야기를 서사적으로 묘사한 것은 아니라고 했다. 옴팔레와 헤라클레스의 이야기를 듣고 자신이 느낀 감정을 그저 스케르초로 표현했을 뿐이라는 것이다. 그러면서 이 곡의 테마를 ‘여자의 매혹’이라고 했다. 하지만 나는 ‘여자의 매혹’이 아닌 ‘여자의 조롱’을 본다. 특히 중간중간 끼어드는 관악기의 익살스러운 음형과 현악 합주가 서정적인 멜로디를 연주하는 동안 연신 빵빵거리는 관악기에서 이런 기분을 느낀다. 생상스는 경쾌한 어조로 옴팔레의 매혹을 그리고 싶었겠지만 그렇다면 스케르초는 피했어야 했다. ‘스케르초’ 하면 ‘경쾌한 익살’이 떠오르기 때문이다.   헤라클레스의 굴욕을 익히 알고 있는 우리가 스케르초를 들으며 상상하는 것은 영웅을 노예로 만든 옴팔레의 치명적인 매력이 아니다. 영웅을 노리갯감으로 데리고 노는 옴팔레의 다소 악의적인 비웃음, 통쾌한 조롱 같은 것이다. 헤라클레스의 귀를 잡아당기며 재미있어 하는 루벤스 그림의 옴팔레처럼. 진회숙 / 음악평론가음악으로 읽는 세상 스케르초 루벤스 그림 현악 합주가 회전 강도

2023-12-11

[음악으로 읽는 세상] 오페라로 빚은 도박

러시아 작가 도스토옙스키는 도박중독자였다. 그는 도박하려고 빚을 졌고, 그 빚을 갚기 위해 글을 썼다. 돈이 급한 나머지 헐값에 소설 판권을 팔아넘기기도 했다. 러시아를 대표하는 대작가로 우아하게 살 수 있었던 그는 도박 때문에 평생 돈에 쪼들리는 비루한 삶을 살았다.   도스토옙스키의 『노름꾼』은 평생 도박판을 전전했던 작가의 경험담을 담은 것이다. 주인공 알렉세이의 심리나 도박판의 풍경 묘사가 그렇게 리얼할 수 없다. 직접 경험해 본 사람만이 할 수 있는 표현의 디테일이 살아 있는데, 특히 알렉세이가 도박판에서 큰돈을 연달아 따는 대목은 읽기만 해도 기분이 짜릿해진다.   러시아 작곡가 프로코피예프는 이 소설을 오페라로 만들었다. 오페라에서 가장 인상적인 것은 도박판 장면이다. 알렉세이가 돈을 걸 때 음악도 숨죽인 듯 조용하게 흘러간다. 끊임없이 돌아가는 룰렛 기계의 움직임을 묘사한 야릇한 음향만 들릴 뿐이다. 사람들은 가진 것을 모두 거는 알렉세이의 대담함에 혀를 내두른다. 갑자기 장내가 조용해지고, 마침내 딜러가 숫자를 외친다. 그 순간 환호성이 터져 나온다. 알렉세이가 돈을 모두 딴 것이다. 음악이 다시 시끄러워진다. 알렉세이와 사람들은 신나는 음악에 맞추어 춤을 추며 이 엄청난 행운이 가져다준 환희를 만끽한다.   도박꾼이 늘 그렇듯 마지막에 알렉세이 역시 무일푼이 된다. 친구가 저녁을 사 먹으라며 준 동전 몇 닢을 만지작거리며 전에 동전 몇 닢으로 대박을 터트렸던 기억을 떠올린다. 그래서 이번에도 그런 행운을 기대하며 도박장으로 달려간다. 하지만 프로코피예프는 단호하기 그지없다. 파국을 예고하는 오케스트라의 짧은 굉음으로 단번에 오페라를 끝내 버린다. “네가 생각하는 일은 절대로 일어나지 않아”라고 말하듯이. 진회숙 / 음악평론가음악으로 읽는 세상 오페라 도박 평생 도박판 주인공 알렉세이 도박 때문

2023-1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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